[평론] 中항일전쟁, 14년인가 아니면 8년인가

【微视频】抗日战争到底是十四年还是八年 

 

 

[자오페이]

2017년 1월 3일, 중공의 교육부는 공개서한을 발표하여 ‘8년항전’을 ‘14년항전’으로 고치라고 요구했는데 공교롭게도 이 시간은 맞습니다. 왜냐하면 중국의 항일전쟁은 1931년, ‘9,18사건’부터 시작하여 1945년, 일본이 투항할 때까지의 14년이기 때문입니다. 항일전쟁의 공로는 장제스(蒋介石)선생이 이끄는 중화민국에 있습니다. 중공은 고생 끝에 동북지방에서 향일전쟁을 했다는 공산당원 한두명을 찾아내서 이를 근거로 공산당이 항전 14년을 수행했다고 인터넷을 통해 역사를 위조했습니다. 중국공산당은 진정한 항일 역사에 대해서는 감히 말하지 못합니다. 오늘 우리는 진정한 항일전쟁에 대해 간략히 말해보겠습니다. 

 

중공이 예전에 14년 항전을 말하지 않은 것은 항전 초기 6년 동안 중공이 일본인과 손잡고 중국에서 내전을 벌였기 때문입니다. 1930년~1934년 10월, 강서(江西)등지에 할거한 공산당은 중화민국을 적대시하며 ‘무장으로 소비에트를 보위’했다고 알려졌습니다. 이 구호는 1929년, ‘중동로사건(中东路事件:중화민국과 소련 간에 일어난 1차 무력 충돌)’ 시기에 나왔습니다. 북벌이 승리한 후 장학량(张学良)은 국민정부의 지지하에 중동로의 주권을 되찾으려고 소련정부와 대대적으로 무력충돌을 벌였습니다. 중공은 소련을 위해서 중국에서 내전을 벌였습니다. 이것은 일본인이 중국을 침범한 것과 무슨 차이가 있을까요? 없습니다. 이 의미로부터 보면 공산당은 바로 매국노입니다.

 

1927년, 일본 소장파(少壮派) 군인들은 ‘9.18사변’을 일으켰습니다. 장학량은 장제스의 명령이 없는 상황에서 저항하지 않고 동북을 포기했습니다. 이때 중국은 일본에 대해 선전포고를 하지 않았는데 이유는 아주 간단합니다. 방금 명목상의 통일을 완성한 중국은 만약 중일전쟁이 일어나면 반드시 패배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전쟁을 하지 않고 다만 참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장제스 선생은 무턱대고 참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머지않아 다가올 중일대전을 대비해 경제와 군사의 두 가지 측면에서 준비를 계속했습니다.

 

1927년~1936년은 중화민국의 ‘황금10년’이였습니다. 중국의 GDP 연간 성장률은 대략 9%이고, 같은 시기 일본의 성장률은 3%이였습니다. 동시에 장제스 선생이 제창한 ‘신생활 운동’도 중화문화와 정신을 새롭게 바꾸었습니다. 만약 이 추세대로 발전해 나간다면 중일 두 나라의 국력 대비는 신속하게 뒤집힐 수 있기에 일본은 급히 전쟁을 치르려 한 것입니다.

 

군사적 준비는 두 측면에 집중되었습니다. 첫 방면은 중국무장역량의 통일적 지휘권을 확립하는 것인데, 이를 위해 군벌 통합과 중공 토벌도 필요했습니다. 또 한 방면은 중국군의 무장 현대화입니다. 장제스 선생은 독일과 희토류 자원 무역을 진행하여 전쟁 발발 전에 중국의 40개 기계화 사단을 독일식으로 무장시키려 했습니다. 그래야 중국에 승산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플레이보이 장학량이 시안(西安)에서 중공의 꼬임에 넘어가 군사반란을 일으킬 줄 누가 생각이나 했을까요? 이 사건으로 장제스 선생의 전반적 전략배치가 혼란에 빠졌습니다. 1937년 루거우차오(卢沟桥)사건(중일전쟁의 발단이 된 양국 군대의 충돌사건)이 폭발하여 중국과 일본은 정식으로 싸움을 시작했습니다. 장제스 선생은 무장이 완성되지 않은 독일식 기계화 사단(탱크와 대포는 운송해오지 않았음)을 투입하여 상하이에서 일본인을 3개월동안 묶어 놓고 중국의 공업, 문물, 학교를 스촨(四川)에 옮겨 전쟁을 계속할 기반을 닦아놓았습니다.

 

외교측면에서 장제스 선생은 미국과 적극적 동맹 외교를 목표로 송미령(宋美龄)여사를 미국에 파견하여 중미(中美)동맹의 기초를 다져놓았습니다. 1941년 12월, 진주만 사건 폭발로 미국은 일본에 선전포고를 했습니다. 따라서 중화민국의 항일전쟁은 승리의 서광이 보였습니다. 1945년, 일본인은 투항하고 중국은 장제스선생의 지도하에 대국의 지위를 다졌습니다.

 

항일전쟁 중에 중공은 무슨 일을 했을까요? 산베이(陕北)에 숨어서 아편을 심고 배후에서 국군에게 불의의 일격을 가했습니다. 펑더화이(彭德怀)는 백단대전(百团大战:100개 연대가 참여한 중국공산당의 국민혁명군 제8로군과 일본제국 육군 사이의 전투)을 일으켜 마오쩌둥에게 일찍이 실력을 노출했다고 비판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이것은 중공이 진정으로 항일할 의도가 없다는 것을 설명합니다. 공산당은 바로 자신을 중국인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공산주의는 바로 민족과 국가를 소멸을 목표로 하기 때문입니다. 중국공산당은 확실히 중국의 정당이 아니라 국제공산당의 중국지부에 불과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