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에는 장독을 열어놓아야 하는데, 엄마가 이번 5월에는 재가 많이 날려서 못 열었대요”

By 윤승화

“보일러실이 5월 내내 하루 24시간 계속 가동이 됐다 그러더라고요.

5월이면 우리가 장독을 열어놓을 때잖아요. 장독을 못 열었대요, 그때 사람들이.

재가 많이 날려서…”

허장환 씨와 광주 국군통합병원 보일러실 / 연합뉴스

지난 14일 광주 대동홀에서는 5·18 기념재단이 주관한 증언대회가 개최됐다.

이날 행사에는 5·18 민주화운동 당시 505보안부대 수사관이었던 허장환 씨와 전 미군 501정보여단 정보요원 김용장 씨가 참석해 당시 상황을 증언했다.

자리에 앉은 허씨는 “계엄군이 사망한 시신들의 시신을 가매장했다가 광주 국군 통합병원 보일러실을 개조해 그곳에서 소각했다”고 폭로했다.

허씨는 이어 미처 소각하지 못한 남은 시신에 관해서는 “비닐로 둘둘 싸서 바다에 버렸다”고 전했다. 김씨 또한 같은 맥락의 내용을 증언했다.

JTBC ‘이규연의 스포트라이트’

김씨는 앞서 지난 3월 JTBC ‘이규연의 스포트라이트’에 출연, 민간인 사상자(행방불명자) 시신에 관해 “아무리 찾아봐도 안 나온다. 나올 리가 없다. 왜? 소각했으니까”라고 언급하기도 했다.

이와 관련, 5·18 당시 시민군으로 활동했던 양기남 씨는 국군병원 주위 민가에서 장독대 뚜껑을 열어두지 못할 정도로 그을음이 많았다고 전했다.

“5월이면 우리가 장독을 열어놓을 땐데, 그때 사람들이 장독을 못 열었다더라. 재가 많이 날려서” 양씨의 증언 내용이다.

JTBC ‘이규연의 스포트라이트’

전직 정보요원인 허씨와 김씨, 그리고 광주 시민이었던 양씨의 증언을 정리하면 하나의 내용으로 귀결된다.

당시 계엄군의 무차별 집단 발포로 발생한 시신들은 광주 국군통합병원으로 이송됐다.

이후 국군병원의 보일러실이 개조됐다. 그곳에서 시신들은 1980년 5월 한 달 동안, 밤낮으로 소각됐다.

5·18 기념재단

5·18 민주화운동이 일어나고 39년이 지났다.

정부가 공식적으로 인정한 5·18 행방불명자 수는 총 83명이다.

행방불명자로 인정받지 못한 채 사라진 240여 명을 더하면 300명이 훨씬 넘는다.

39년이 지나도록 뼈 한 조각조차 발견되지 않은 이들.

남은 가족들의 소망은 단 하나였다. 죽기 전까지만이라도 시신을 찾아 묻어주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