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륵사지 석탑 감사에서 드러난 ‘원형복원’의 어려움

건축문화재 원형(原形), 시기 특정과 정의 힘들어
“문화재 수리는 이상과 현실의 싸움…최선 방안 도입해야”

백제 무왕(재위 600∼641) 대인 639년 건립한 국내에서 가장 오래되고 큰 석탑인 익산 미륵사지 석탑(국보 제11호)이 논란의 중심에 섰다.

발단은 국립문화재연구소가 2001년 10월 시작해 최근 마무리한 미륵사지 석탑 해체·수리 공사에 대한 감사원 감사 결과 발표였다.

감사원은 지난 21일 공개한 ‘국가지정문화재 보수복원사업 추진실태’ 감사 보고서에서 미륵사지 석탑을 첫머리에 올리고 보수가 ‘부적정’했다고 밝혔다.

문제가 된 부분은 석탑 외부가 아니라 겉보기에는 나타나지 않는 내부인 적심(積心). 미륵사지 석탑 적심은 본래 모양이 일정하지 않은 돌과 흙으로 채워졌으나, 돌과 돌 사이를 메운 흙이 빠져나가 구조적으로 불안정한 상태였다.

감사원이 석탑 보수 과정을 살펴본 뒤 적심에 대해 지적한 사항은 크게 구성물과 절차로 요약된다.

감사원은 연구소가 본래 적심을 해체할 때 확인한 공법대로 복원하기로 했으나, 6층 중 1∼2층은 새롭게 가공한 직사각형 석재를 사용하고 3층 이상은 기존 부재를 활용했다고 비판했다. 아울러 적심석 사이에 성능이 뛰어난 실리카퓸 배합 접착제가 아니라 접착력이 다소 떨어지는 황토 배합 접착제를 썼다고 몰아붙였다.

또 적심석 구성과 접착제를 변경하는 과정에서 설계도서를 새롭게 작성하지 않고 전문가 자문도 거치지 않는 등 절차상 문제를 노출했다고 강조했다.

이에 따라 미륵사지 석탑이 ‘원형'(原形)을 상실하고 일관성이 떨어졌으며 안정성을 확보하지 못했다는 것이 감사원 결론이다.

문화재청은 적심 구성물이 달라진 이유에 대해 1∼2층 내부를 새로운 석재로 쌓은 뒤 안정성이 어느 정도 갖춰졌다고 판단했고, 3층 이상은 해체 과정에서 나온 기존 적심석의 역사적 가치를 살리려고 재활용을 결정했다고 해명했다.

익산 미륵사지 석탑의 해체 당시와 축석 후 평면 비교 /감사원 제공=연합뉴스

감사원이 미륵사지 석탑과 관련해 연구소를 비판하면서 여러 차례 언급한 용어가 ‘원형’이다. 그 근거로 제시한 법 조항은 “문화재 보존·관리·활용은 원형 유지를 기본원칙으로 한다”는 문화재보호법 제3조다.

하지만 문화재 수리와 복원에서 기준이 되는 ‘원형’은 누구나 쉽게 말하지만, 실상은 매우 정의하기 어려운 단어여서 문화재계에서 여전히 관련 논의가 진행 중이다.

24일 문화재청에 따르면 연구소가 펴내는 계간 학술지 ‘문화재’는 지난 2016년 봄호에서 ‘문화재 원형 개념의 역사적 변천 과정과 적용상의 제문제’를 특집으로 다뤘다.

이수정 문화재청 학예연구사는 원형 개념이 유입된 과정을 분석한 논문에서 “원형이라는 개념은 과거에 만들어진 산물을 문화재로 인식하면서 생겨났다”며 “우리나라는 일제강점기를 전후해 원형 개념이 들어왔다고 본다”고 설명했다.

이 연구사는 이어 “우리나라는 원형 개념을 받아들인 뒤 역사성을 중시하는 태도를 취했지만, 역사성은 다양한 시대의 층위와 흔적보다는 오래된 것을 의미했다”며 “이러한 태도에는 문화재를 민족 정체성 회복을 실현하는 물리적 대상으로 인식하는 관점이 작용했다”고 덧붙였다.

강현 국립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관은 건축문화재의 원형 개념을 다룬 글에서 “건축문화재 보존에서 원형과 관련된 논쟁은 크게 보면 ‘예술적 가치’와 ‘역사적 가치’ 중 어느 쪽을 중요하게 여기느냐의 문제로 귀결된다”고 밝혔다.

건축물을 예술적으로 본다면 예술가가 창조성을 바탕으로 제작해 최종적으로 완성된 상태가 원형이고, 역사적으로 인식한다면 건물에 존재하는 다양한 시대적 층위 중에 창건 당시 모습 혹은 전성기 모습이 원형이 된다는 것이다.

다만 동양에서는 건축물을 예술가의 창작물이 아니라 생활공간으로 인식했기에 현재 국내에서는 건물의 전성기 형태를 원형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다.

그는 “원형은 대체로 객관적이고 절대적인 개념에서 주관적이고 상대적인 개념으로 변화했다”며 “건물 외관적 형상뿐만 아니라 건축 부재, 건축 기술에도 원형 개념을 적용하게 됐다”고 주장했다.

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 관계자는 1990년부터 복원 공사가 진행 중인 경복궁의 경우 원형이 되는 시점을 궁이 처음 만들어진 조선 태조(재위 1392∼1398) 시기가 아니라 고종(1863∼1907)이 중건한 19세기 후반으로 본다고 설명했다.

22일 파란 하늘 아래 익산 미륵사지 석탑(제11호)이 위용을 드러내고 있다. 2019.3.22 /국립문화재연구소 제공=연합뉴스

그는 “태조 때 건물 자취는 높이가 너무 낮아서 현실적으로 기준으로 삼기 어렵다”며 “광화문 현판 글씨를 중건 당시 훈련대장 임태영 글씨로 복원한 이유도 19세기 후반을 원형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1천400년 가까이 보존된 미륵사지 석탑은 창건 당시 기록이 없어서 첫 모습이 어떠했는지 알 수 없다. 그래서 보수 도중 탑을 몇 층까지 쌓을지를 두고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미륵사지 석탑 원형은 일제가 콘크리트로 공사하기 전 모습으로 보는 학자들이 많지만, 이에 대한 명확한 기록도 없다.

한 문화재 수리 전문가는 “문화재 원형은 말 그대로 ‘케이스 바이 케이스'”라며 “감사원 지적대로 석탑 적심을 해체 당시 모습대로 다시 쌓으려면 기록화 사업을 철저히 해야 할뿐더러 약해진 돌을 모두 강화 처리하고 사용 여부를 판단해야 해 공사기간이 매우 길어진다”고 주장했다.

그는 사견임을 전제로 “감사원은 적심 구성물 중 돌은 원형을 따르지 않았다고 지적하면서, 돌 사이를 메운 접착제에 대해서는 원형이 아닌 성능을 잣대로 삼는 모순을 보였다”며 “원형을 따진다면 화학물질인 실리카퓸보다 흙인 황토가 낫지 않은가”라고 반문했다.

학계 전문가는 “문화재 수리를 하다 보면 원형이라는 이상과 안전성·비용·공사기간이라는 현실 사이에서 고민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수시로 전문가 조언을 받아가며 최선의 방안을 도출해야 한다”며 “미륵사지 석탑을 계기로 원형 개념에 대한 논의를 진지하게 하면 좋겠다”고 말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