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치병 아기 구하기 위해 인생 바친 의사’

By 이 충민

황해도 은율에서 초등학교만 졸업하고 서울에 올라온 한 시골출신 학생이 있었다. 홀어머니 밑에서 가난하게 자란 이 학생은 먹고 살기 위해 목욕탕 심부름꾼, 모자가게 점원 등 닥치는 대로 일을 해야 했다.

그러다 우연히 의학강습소에서 아르바이트 자리를 얻게 됐다. 등사기를 밀어 강습소 학생들이 볼 강의 교재를 만들던 그는 자신이 만든 교재에 호기심이 생겼다. 왠지 의학에 이끌렸던 그는 자신이 만든 교재들을 들고 독학하기 시작했다.

당시에는 의대에 다니지 않아도 시험만으로도 의사 면허증을 딸 수 있었던 시절이었다. 그는 2년간 밤낮 학업에 매달린 끝에 결국 19세에 국내 최연소로 의사고시에 합격할 수 있었다.

1937년 그가 처음 근무한 병원은 명동 성모병원이었다. 평범하게 진료를 하던 어느 날 그는 운명적 상황과 맞닥뜨리게 된다. 뼈가 앙상하고 배만 볼록 솟은 갓난아기 환자가 찾아온 것.

원인 모를 괴질에 아이 엄마는 “제발 살려달라” 애원했지만 그는 어떻게 해도 아기를 낫게 해줄 방법을 찾지 못했다. 아기는 끝내 세상을 떠났고 이후에도 복부 팽만으로 병원을 찾은 여러 신생아들이 설사만 하다가 무력하게 죽어갔다. 이 청년 의사는 깊은 자책과 의문에 빠져 헤어나오지 못했다.

MBC캡처

20여 년이 지난 1960년, 그는 43세의 원숙한 의사가 됐지만 이 의문의 병을 고치기 위해 뒤늦은 유학의 길을 떠났다.

아내와 6남매의 자식을 떠난채, 안정된 삶을 포기하고 떠난 큰 모험이었다. 처음에는 영국 런던대학원과 갔지만 원하는 자료를 얻지 못해 미국 샌프란시스코 UC메디컬센터로 건너가 연구자료를 뒤져가며 공부했다.

결국 유학을 떠난 지 3년 만에 그는 의학서적을 보다 ‘유당불내증(乳糖不耐症ㆍlactose intolerance)’이란 제목을 보고 무릎을 탁 쳤다. 그동안 한 번도 소개되지 않았던 원인 모를 괴질이 우유나 모유의 유당을 소화하지 못해 발생한 가스로 배가 부풀어 올라 결국 영양실조로 사망한다는 내용이었다.

20년 동안 풀지 못한 수수께끼가 풀린 순간이었다.

그는 그 길로 한국으로 돌아와 서울 명동에서 ‘정소아과’를 운영하며 아내와 함께 치료약 개발에 매달렸다.

그는 유당이 없으면서 우유를 대신할 수만 있다면 문제는 해결될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다가 갑자기 어린 시절 어머니가 해주던 콩국이 떠올랐다. 그리고 연구 끝에 3년만에 원하는 두유 개발에 성공했다.

이후 두유를 설사병에 걸린 신생아들에게 주니 아이들이 기적처럼 기력을 회복하기 시작했다.

그는 회상했다. “제 인생에서 최고로 기뻤던 순간입니다.”

그는 이후 두유를 개발한 공로로 1966년 제1회 발명의 날 대법원장상을 받게 된다.

초창기 베지밀 모습

소문이 나면서 병원에 환자들이 몰리기 시작했고 두유 공급이 부족하게 됐다. 결국 그는 1973년 병원을 접고 ‘정식품’이란 회사를 세워 두유 대량 생산에 몰두했다.

그는 두유가 식물성 우유라는 점에 착안해 식물(vegetable)과 우유(milk)의 영문을 합성해 ‘베지밀’이란 이름을 만들어 붙였다. 지금도 국내두유시장에서 점유율 선두를 달리는 베지밀은 바로 이렇게 탄생했다.

이 베지밀을 개발한 이가 바로 고 정재원 박사다.

우리나라 최초로 두유를 발명한 정재원 박사는 지난해 10월 9일 생명을 살리기 위한 고귀한 정신을 세상에 남기고 향년 101세로 평창동 자택에서 노환으로 별세했다.

고 정재원 박사(정식품)

(이미지=정식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