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비한 프랑스 카르타크의 거석 유적(사진들)

[www.ntdtv.co.kr 2013-12-07 18:50]

대서양에 인접한 프랑스 브르타뉴 반도의 읍인 카르나크는 신비한 고장이다. 교외에 하나하나 정교하게 배열된 석진(石陣)이 있는데 길이 8킬로미터에 걸쳐 우뚝 솟은 거석들이 곳곳에 놓여 있다. 거의 3천 개 남짓한 돌들이 정연하게 배열돼 있지만, 자연의 힘이 한 것은 분명 아니다. 이것이 바로 ‘피라미드보다 더욱 신비’한 카르나크의 석진이다. 카르나크의 석진은 밭과 수림과 농가를 가로질러 질서 정연하게 똑바로 세워져 있는 것이 마치 정성 들여 만든 것 같다. 전문가들은 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법으로 측정하여, 석진이 나타난 것은 약 기원전 4,300년 전후이며 인근 바위산에서 사람들이 채석해와 세운 것으로 본다.

카르나크의 석진에는 거의 만개에 달하는 돌기둥이 있었는데 수백 년 전부터 많이 훼손되어 지금은 2천여 개만 남았다. 석진의 돌은 주로 양 우리와 닭장을 짓고 화로를 쌓거나 기타 건축하는 데 썼다. 도로를 내기 위해 옮겨버린 경우는 더 많다. 이런 유적에 대한 지속적인 관리에 대해서는 줄곧 많은 논란이 있었다.

카르나크의 석진
카르나크 석진에 본격적 관심이 쏠린 것은 20세기 후반기에 와서입니다. 석진은 초기에 세 줄이었는데, 각 줄은 약 천여 개의 돌로 조성됐다. 제일 서쪽에 있는 것은 메네크(Menec) 석진으로서 모두 1,099개의 돌이 있는데 12줄로 세웠다. 그중의 하나는 다른 돌보다 다 높아 3.7미터에 달하며 ‘거인’이란 이름이 붙었다. 하지만 메네크(Menec) 석진 동부의 케르마리오(Kermario) 석진에 비해 이곳의 대부분 돌은 여전히 비교적 작다. 케르마리오(Kermario) 석진에는 모두 1,029개의 돌이 있고 열 줄로 세워졌으며 길이는 1,120미터이며, 각 줄 사이 간격은 약 1미터이다. 이 석진의 돌은 머리가 제일 큰데 줄곧 케를레스캉(Kerlescan) 거석진 부근까지 이어졌다. 케를레스캉(Kerlescan) 거석진은 594개의 돌, 13줄, 길이 880여 미터로 구성되었다.

이 세 개 석진은 원래는 하나로 이어졌는데 배치는 통일된 하나의 원칙에 근거했다: 서쪽의 돌기둥이 제일 높고 지세 역시 서부는 동부보다 좀 높다. 동쪽의 비교적 작은 돌들은 배치 간격도 비교적 짧다.

거석진에는 몇 가지 형식이 있는데 그 중 가장 보편적인 것은 직립식(멘히르,Menhirs)이다. 즉 하나의 거석을 단독으로 곧게 세우는 것으로 열을 짓는 것이다.

두 번째는 문식(돌멘,Dolmen)으로서 두 개의 거석을 곧게 세워놓고, 가로 놓은 거석을 떠받쳐 문 형태를 이루는 것이다. 보통 묘지에 사용한다. 케르마리오 석진이 가장 대표적인 문식 석진이다.

세 번째는 복도식(알레쿠베르테,Alleecouverte)으로서 거석 몇 개를 양쪽에 세우고 그 위에 한 줄의 거석을 올려놓아 대청으로 가는 통로를 형성한다.

네 번째는 봉분식(투물루스,Tumulus)인데, 문식 거석의 기초에서 돌과 흙으로 원형의 작은 산을 형성해 묘지로 쓴다.

사전시기의 사람들이 어떻게 이처럼 방대한 거석진을 세울 수 있었는지는 풀기 어려운 수수께끼이다. 당시에 이러한 석진을 세우려면 한 두 사람으로 하루 이틀 사이에 해 낼 수는 없었으며 모든 과정을 사람 힘으로 해 낼 수 있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설치자는 반드시 많은 사람을 동원하여 초과학적 기술과 다년간의 노동을 투입해야 한다. 각각의 돌마다 수 톤의 무게이며 가장 무거운 돌덩이는 385톤에 달하는데 4,300년 전에는 바퀴가 발명되지 않아 바퀴 기술, 길이나 면적 측량과 기하학 등을 적용할 수 없었다. 또한 대규모의 사회자원 협력과 자본 축적이 없이는 몇 킬로미터나 뻗어나간 이 거석진을 쌓기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신비한 설치자는 도대체 누구일까?

현지전설
현지에 하나의 전설이 있는데, 기원전 56년에 켈트족이 갈리를 정복했다. 로마인이 카르나크를 침범했을 때 카르나크의 수호신이 산 정상에 올라가 보니 로마인이 곧 진입해 올 것 같자, 급한 김에 마법으로 로마병사를 정연하게 줄 지어 선 석진으로 변하게 했다고 한다. 비록 이는 전설에 불과하지만 18세기 적지 않은 학자들은 석진이 켈트시대에 만들어 졌다고 확고히 믿었다.

또 어떤 사람은 거석진이 바로 천문대라고 한다. 수많은 이런 관점의 연구는 거석진과 태양이 긴밀한 관련이 있다고 주장한다. 어떤 사람은 카르나크는 종교 중심지이며, 그 돌은 원래 고대 브루타뉴 사람이 숭배한 우상이라고 한다. 또 어떤 사람은 석진은 여성의 길상석이라고 한다. 그들에 따르면 불임증 여성이 돌 위에 꿇어앉거나 몇 밤을 자기만 하면 돌의 마력이 그녀를 임신시키고, 새 생명이 탄생하게 되면 바로 사람들은 돌기둥 하나를 세웠다고 한다.

카르나크 사람이 남겨놓은 수수께끼:
한 고고학자는 1979년-1984년 사람들을 인솔하여 카르나크 해변 가브리니(Gavrinis) 섬에서 한 통로 무덤을 발굴했는데 그 무덤은 세심하게 건축한 지하 건물이었다. 대리석으로 쌓은 동심 원추대는 마치 노천 운동장의 관람석 같았고, 무덤 벽에는 정미한 도안이 아로새겨 있었다. 통로 무덤 안의 29개 무덤 석판 중 23개에 도안을 새겼는데 그것은 동심원호, 도끼, 뱀, 양 방목자의 지팡이 등 도안이었고 또 여신 비슷한 초상도 있었다. 그들은 20킬로미터 밖에서 또 다른 하나의 옛 무덤을 발견했는데 무덤 안의 돌 조각도 도안이 비슷했다.

20킬로미터 밖의 그 옛 무덤의 내실에서 발견한 비슷한 돌 조각도 가져와 한데 모아서 전체를 맞추어 놓으니 정확히 14미터이고 총 무게는 몇 톤 이상인 그림 석판이 나타났다. 이 한 덩어리 석판은 인위적으로 잘라졌음이 아주 분명했다. 왜 완전한 석판을 잘랐는가? 왜 20킬로미터를 사이 둔 두 개의 무덤에 갈라 넣었는가? 도대체 무슨 도구로 30여 톤이나 되는 거석을 그렇게 먼 거리로 옮겨갔는가? 아직은 도무지 답이 나오지 않는다.

NTD Korea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