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 전, 한국에 지고도 혼자 남아서 축하해줬던 벤투의 ‘품격’

By 이서현

한국 축구사에서 길이 남을 벤투호의 도전이 막을 내렸다.

12년 만의 월드컵 16강 진출이라는 기대 이상의 공을 세운 파울루 벤투(포르투갈) 감독은 ‘벤버지’라는 애칭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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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소 보수적인 경기 운영으로 ‘황소고집’이라고 비판받기도 했던 벤투 감독의 전략은 월드컵 본선 무대를 거치며 재평가됐다.

현재 폼이 좋은 선수를 적재적소에 배치했고, 16강 진출 확정 후 선수들과 진심으로 기뻐하는 모습을 보이며 한국 축구 팬들의 심금을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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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나와의 경기에서는 일부러 벤투 감독이 레드카드를 받았다는 이야기도 나왔다.

코너킥 기회를 빼앗겨 격분한 선수들이 따지자, 주심이 카드를 꺼내려는 듯 주머니에 손을 넣는 모습을 본 벤투 감독이 다급히 달려가 주심의 팔을 붙잡으며 더 강력하게 항의했던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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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레드카드를 받고 필드를 빠져나가려던 그는 가나 스태프들을 마주치자 재빨리 몸을 돌려 악수를 건네고 가볍게 포옹했다.

못 보고 지나칠 뻔한 오토 아도 가나 감독과도 따뜻한 표정으로 인사를 나눴다.

이를 지켜본 축구 팬들은 “기분이 태도가 되지 않는 멋진 모습” “진정한 스포츠맨십” “화내는 대상이 명확한 게 프로답다”,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 중 하나”라며 그의 태도에 박수를 보냈다.

2002년 한일월드컵 당시 선수로 뛴 파울루 벤투 감독(왼쪽) | 연합뉴스

최근 SNS상에서 화제가 된 ‘파울루 벤투 2002 한국전 인터뷰’ 영상을 보면 과거 선수 시절에도 한결같은 모습이었다.

영상 속 포르투갈 리포터는 “벤투 선수를 격려하고 싶다. 혼자 남아 인터뷰에 응해줬다”면서 “벤투, 포르투갈의 꿈이 깨졌습니다”라고 인터뷰를 시작했다.

2002년 6월 14일 한일월드컵 D조 3차전에서 포르투갈이 한국에 1-0으로 패배한 직후였다.

33살의 벤투 감독은 당시 포르투갈팀의 수비형 미드필더로 풀타임 경기를 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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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한국과 미국을 축하해주는 것이다. 전반적으로 우리보다 강한 팀이었다”라며 한국의 16강행을 축하해 줬다.

이어 “우리는 이제 유로 2004를 준비하면 된다. 그게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이다”라는 말을 남기고 라커룸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20년 전에도 그는 패배 직후 그라운드에 홀로 남아 상대국을 축하하고 미래지향적인 내용으로 인터뷰에 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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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부터 16년 뒤 벤투 감독은 한국 대표팀의 지휘봉을 잡게 됐고, 원정 대회 사상 두 번째 16강 진출이라는 쾌거를 이뤘다.

벤투 감독은 이번 대회를 끝으로 한국 대표팀과 인연을 마무리한다.

역대 최장기간인 4년 4개월 동안 부임한 벤투 감독은 한국 축구 발전을 위해 그동안 훈련과 관련된 내용을 영상과 텍스트로 꼼꼼히 남겨 둔 것으로 알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