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인이 가보고 싶어하는 여행지! 충청남도

 

한국과 중국, 공통의 정서

“작년 1년 동안 양국을 오간 사람들의 숫자는 1천300여만 명에 달합니다. 이렇듯 한국과 중국은 가장 가까운 이웃입니다. 한국에는 ‘이웃사촌’이란 말이 있습니다. 이웃이 친척보다 더 가깝다는 뜻입니다. 중국과 한국은 지리적 가까움 속에서 유구한 세월 동안 문화와 정서를 공유해왔습니다.”

                                                – 문재인 대통령 베이징대 연설 전문-

 

공자의 고향 산동성에서 시작된 유학사상은 오늘날 한국에서 그 정신적 유산이 가장 오래 남아 있다. 조선 태조는 타락한 고려를 뒤로 하고 유가를 국가 이념으로 하는 새로운 나라를 세웠다. 조선은 동시대 세계 여러 나라와 비교할 때 이미 최고의 지식 수준에 올라 있었다. 극기복례(克己復禮)를 통해 이상적인 인간형인 군자가 되고자 했던 유학은 조선 500년 역사 동안 많은 위인을 낳았고 조선의 국가 도덕을 유지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특히 조선시대 충청남도를 중심으로 발전한 기호유학(畿湖儒學)은 당시의 유학사상을 주도했고, 오늘날 충청남도에 많은 문화적 유산을 남겼다.

 

인간의 길, 공자의 가르침!

논산의 공자 유적지로 공자님을 모시고 있는 사당 ‘궐리사’

공자가 태어났던 마을 이름인 궐리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는 ‘궐리탑’

 

유학정신과 항일운동

‘선비’는 학식과 고결한 인품을 지닌 사람에 대한 호칭. 그래서인지 선비의 고장이라 불리는 충청남도는 항일운동의 중심지이기도 했다. 의(義)와 불의(不義)를 구분하고, 의를 행하는 게 유학의 정신이기 때문이다.

충남 홍성의 여러 인물 중에 남당 한원진 선생의 발자취가 남아있는 ‘양곡사’.

충절의 상징인 양곡사는 그의 강직함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한원진은 ‘인물성이론(人物性異論)’을 대표한 학자로, 그의 학문과 사상은 한말 위정척사파와 항일의병운동의 사상적 근원이 됐다. 훗날 김좌진, 한용운, 윤봉길 등 충남지역의 무수한 독립운동가들이 그 영향을 받았다.

윤봉길 의사의 위패가 모셔져 있는 ‘충의사’

 

“중국 백만대군도 하지 못한 일을 조선의 한 청년이 해냈다.”                                                                     中國100萬大軍都沒能做到事,結果卻由一名朝鮮青年完成了)

                                                                         -장제스 총통

독립운동가 윤봉길 의사를 향한 장제스 총통의 이같은 격찬은 국제적으로도 한국의 독립운동에 관심을 갖게 하는 계기가 되었고, 특히 중국인들의 한국 독립운동에 대한 의식의 전환을 가져다 주었다.

장제스 총통

 

“충청도 양반”이라는 말이 이곳에서 나왔다오

조선 숙종 때의 학자 윤증의 고택.

노성면 교촌리는 파평 윤씨들의 세거지로서 명재고택은 19세기 중엽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고 현재 후손들이 살고 있다.

교촌리는 중국의 4성 5현 10철 그리고 한국의 18현의 위패를 모시고 유림들이 모여 제향을 해오고 있다.

 

명재고택은 향촌 사대부가의 위엄을 갖추고 있어 중요 민속자료 190호로 지정되어 있다.

 

서예, 그림, 고서에서 전달되는 선비의 분위기

명재고택은 구조가 간결하면서도 짜임새가 매우 견실하다. 조선 후기 향촌 사대부가 주택의 멋을 잘 보여주는 집이라고 할 수 있다.

한옥은 지은 사람의 세계관을 엿볼 수 있다고 한다. 자연친화적이거나 아녀자에 대한 배려 그리고 고대 과학이 그 안에 숨어있기도 하다.

햇빛, 바람, 하늘, 자연과 같은 환경을 대하는 태도는 그곳에 사는 사람의 정신적, 심리적, 정서적 건강과도 맞닿아 있다. 자연과 맞서지 않고 순응했던 한국인의 정서가 배어 있다.

 

파평 윤씨 문중에서 운영해오던 서당

붉은 홍살문을 지나면서 바로 우측에 종학당(宗學堂)이 있고, 좀 더 위로 올라가면 정수루(淨水樓), 보인당(輔仁堂) 등 건물이 있다.

종학당은 기호학파 유림들의 학문을 서로 교류하는 중심도장의 역할과 함께 파평 윤씨 문중의 자녀들 교육을 담당하였다.

창건 후 약 340여년 간 많은 인재를 배출한 학문의 요람으로 노성 파평 윤씨 가문의 문과 급제자 46인의 대다수가 이곳 출신이었다고 전해진다.

한 장소에서 공부한 사람들이 과거에 40명 이상 배출된 것은 조선 600년 역사에 처음 있는 일이라고 한다.

종학당의 전신(前身)은 현 위치에서 서북쪽으로 약 50m 거리에 있는 정수루

정수루는 누각과 서재가 있어 선비들이 학문을 토론하며 시문을 짓던 장소였다.

충청남도 곳곳에 이처럼 큰 학자와 항일지사들이 수없이 배출된 것은 가문에서, 나라에서 운영하던 서원이 있었고, 스승과 제자가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학문에 정진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덕은 결코 외롭지 않으며 반드시 이웃이 있다”(德不孤必有隣) 

논어의 구절처럼 충청남도의 전통과 역사, 유학을 바탕으로 한 고고한 정신은 사람들의 발길을 이곳으로 이끈다. 수려한 자연과 넉넉한 인심, 여유 그리고 위인들의 유산이 보존되어 있는 충청남도, 중국인 벗이 있다면 함께 들러봐도 좋을 여행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