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시한폭탄 ‘비격진천뢰’ 무더기로 발견돼

조선시대에 조성한 전북 고창 무장현 관아와 읍성에서 조선 시한폭탄인 비격진천뢰(飛擊震天雷)가 무더기로 나왔다.

비격진천회는 말 그대로 목표물을 향해 날아간 뒤 폭발하는 획기적인 병기이다.

호남문화재연구원은 무장읍성 객사 동쪽에서 발굴조사를 진행해 무기 창고로 추정되는 건물터 근처에서 발견한 비격진천뢰 11점을 15일 현장에서 공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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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최초의 시한폭탄인 비격진천뢰는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전 선조(재위 15671608) 연간에 화포장 이장손이 발명했다고 알려졌다.

무쇠 재질 원형 박 모양으로, 내부에는 화약과 쇳조각, 발화 장치인 죽통(竹筒)을 넣었다.

완구(碗口)라는 화포에 넣어 발사하면 목표 지점에 도착해 일정 시간이 흐른 뒤 천둥·번개와 같은 굉음·섬광을 내면서 터져 수많은 파편을 쏟아낸다.

육군박물관 비격진천뢰(연합뉴스)

조선왕조실록 선조 25(1592) 9 1일 기사에는밤에 몰래 군사를 다시 진격시켜 성 밖에서 비격진천뢰를 성 안으로 발사해 진 안에 떨어뜨렸다.

적이 그 제도를 몰랐으므로 다투어 구경하면서 서로 밀고 당기며 만져보는 중에 조금 있다가 포()가 그 속에서 터지니 소리가 천지를 진동하고 쇳조각이 별처럼 부서져 나갔다는 대목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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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학계에 보고된 비격진천뢰는 모두 6. 무장읍성처럼 10여 점이 한꺼번에 출토된 사례는 없다.

이영덕 호남문화재연구원 조사연구실장은 이날 현장 설명회에서비격진천뢰는 임진왜란 때 경주성·진주성·남원성 등지에서 사용됐고, 변이중(15461611)이 화차와 함께 제작해 행주산성 전투를 승리로 이끌기도 했다고 설명했다.

이 실장은무장읍성 비격진천뢰를 제작한 시점은 명확하게 알기 어렵지만, 구덩이에 폭탄을 모아놨다는 점에서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묻은 듯하다고 덧붙였다.

문헌에 따르면 고종은 1871년 신미양요가 일어나자 이듬해 무장현에 화포군 40명을 배치했고, 1894년 동학농민군이 무장읍성에 입성할 당시 바로 들어가지 않고 며칠간 관군에 위세를 보였다.

이 실장은군기고가 불타서 포탄이 폐기된 것이 아니라 고의로 묻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비격진천뢰는 조선 후기까지 사용했는데, 동학농민운동 당시 관군이 도망가면서 은닉한 듯하다고 추정했다.

비격진천뢰가 나온 수혈 인근에서는 포를 쏜 시설로 짐작되는 포대(砲臺) 유적과 방화수를 담기 위해 조성한 것으로 보이는 항아리가 발견됐다.

무장읍성은 1417년 왜구 침입을 막기 위해 쌓은 길이 1.2㎞ 성으로, 고창군이 2003년 복원정비 계획을 수립한 뒤 연차적으로 발굴조사를 진행했다. 이를 통해 지금까지 각종 건물터와 성벽, 문터, 해자가 확인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