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문학과를 가고 싶었던 한 어부가 취재진에게 “제게도 꿈은 있었습니다”라며 한 말

By 안 인규

머리가 희끗해져 가는 어부에게 물었다. “선장님의 어릴 적 은 무엇이었습니까”

그러자 어부는 아픈 표정으로 시를 읊었다.

최근 KBS가 공식 운영하는 유튜브 채널 ‘KBS 다큐’에는 앞서 방영된 KBS ‘다큐3일 – 동해시 묵호항 72시간’ 편이 올라왔다.

강원 동해에 있는 묵호항. 이곳에는 밤부터 아침까지 작업하는 문어잡이 어선이 많다.

이날 취재진은 문어잡이로 생계를 꾸려가는 고석길 선장과 함께 문어잡이 과정을 기록했다.

KBS ‘다큐3일’
KBS ‘다큐3일’
KBS ‘다큐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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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차 안전벨트를 빼서 배에 쓰이는 안전장치를 자체적으로 개발할 정도로 문어잡이를 사랑하는 고석길 선장님.

하지만 웬일인지 이 날따라 문어가 한 마리도 잡히지 않았다.

선장님은 “오랜 기다림일수록 만남의 기쁨을 더한다지만 아직 너무 조용하다”며 “문어 얘들이 여기서 오라, 저기서 오라, 손짓을 해줘야 내가 갈 텐데…”라며 아쉬워했다.

고석길 선장님뿐만 아니라 다른 문어잡이 배들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KBS ‘다큐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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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다큐3일’
KBS ‘다큐3일’

문어잡이 배 한 척이 고석길 선장님의 배로 다가왔다. 해당 배에 탄 동료 어민은 “물때가 안 맞다”며 푸념했다.

고석길 선장님은 동료 어민에게 음료가 든 잔을 건네고는 “썩어가는 마음의 상처를 위하여”라고 건배사를 읊었다.

표현력이 예사롭지 않은 선장님에게 취재진은 “선장님의 어릴 적 꿈은 무엇이었어요?”하고 질문했다.

그러자 선장님은 고개를 돌려 잠시 표정을 감췄다. 그러다 어렵게 입술을 떼었다.

“왜 또 아픈 상처에 소금을 뿌리십니까… 제게도 꿈은 있었습니다. 난 있잖아요, 국문학과를 가고 싶었어요”

KBS ‘다큐3일’
KBS ‘다큐3일’
KBS ‘다큐3일’
KBS ‘다큐3일’

선장님은 이어 자신이 좋아하는 시를 즉석에서 낭송했다. 이형기의 ‘낙화’였다.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봄 한 철 격정을 인내한 나의 사랑은 지고 있다. 분분한 낙화…”

그러더니 종이컵에 물을 따른 선장님은 다른 시를 읊었다. 조지훈의 ‘사모’ 중 한 구절이었다.

“한 잔은 떠나간 너를 위하여. 한 잔은 너와 나의 영원했던 사랑을 위하여. 한 잔은 이미 초라해진 나를 위하여. 그리고 마지막 한 잔은 미리 알고 정하신 하나님을 위하여…”

이제 막 뜨는 해를 보며, 하늘을 향해 종이컵을 들어 보이는 선장님.

KBS ‘다큐3일’
KBS ‘다큐3일’
KBS ‘다큐3일’
KBS ‘다큐3일’

어린 문학청년은 어느새 머리 희끗한 어부가 됐다.

어부로서의 삶도 좋았다. 이 와중에 문어가 드디어 잡혔는데, 선장님은 “한 마리 잡았더니 뿌듯하네. 이 낙에 산다우”라며 아이처럼 기뻐하는 모습이었다.

“문어네! 아이고, 얘야. 얼굴 좀 보자. 너 그거 아냐. 내가 너를 보기 위해서 많이 인내했다는 것을”

문어를 낚는 바다 위의 시인. 그 누가 선장님에게 소싯적 꿈을 이루지 못했다고 할 수 있을까.

KBS ‘다큐3일’
KBS ‘다큐3일’
KBS ‘다큐3일’
KBS ‘다큐3일’

선장님은 취재진에게 말했다.

“서울도 좋고, 도회지도 좋겠지만, 나는 여기가 참 좋습니다. 삶이 끝날 때까지 여기서 살려합니다”

선장님의 이야기를 접한 한 시청자는 말했다.

“잔을 들자. 한 잔은 여전히 시를 가슴에 품고 사는 어느 어부를 위하여…”